1부
1장 최단 경로
비는 오후 두 시부터 쏟아지기 시작했다. 윤서하는 한 손에 우산을, 다른 손에 부케 상자를 든 채 뛰었다. 한쪽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는 신부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계속 흘러나왔다.
"네, 신부님. 10분이면 도착해요. 아니, 5분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서하는 자신이 어디쯤 와 있는지도 몰랐다. 휴대폰 속 파란 점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엉뚱한 쪽으로 미끄러졌다. 휴대폰을 오른쪽으로 돌리자 지도도 따라 돌았고, 왼쪽으로 돌리니 이번에는 출발점이 위로 올라갔다.
"점이 왜 자꾸 반대로 가…."
파란 점만 따라가다 보니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는 표지판이 눈앞에 나타났다. 서하는 멈춰야 한다는 생각보다 길을 잘못 들었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차렸다. 이미 문 안쪽이었다.
거대한 물류창고였다. 천장까지 쌓인 박스들 사이로 지게차 경고음이 울렸다. 서하가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누군가 그녀의 팔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지게차가 방금 그녀가 서 있던 자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여기 동선 한가운데예요. 나가세요."
작업복 위에 사원증을 건 남자였다. 목소리에는 짜증도, 걱정도 없었다. 그냥 사실을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저, 더 라움 웨딩홀 가야 하는데요. 앱이 여기라고 해서…."
남자는 서하의 휴대폰 화면을 힐끗 보더니 곧장 말했다.
"반대 방향이에요. 정문 나가서 좌회전, 두 번째 신호에서 우회전, 육교 건너서 300미터."
한 번에 쏟아진 길 설명이 서하의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엉켰다.
"…좌회전 다음이 뭐였죠?"
남자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
"좌회전, 두 번째 신호, 우회전, 육교, 300."
설명은 더 짧아졌고 서하의 머릿속 길은 더 복잡해졌다. 그녀는 부케 상자를 고쳐 안고 말했다.
"그냥… 데려다주시면 안 돼요?"
"제가 왜요?"
서하는 부케 상자를 남자의 눈앞에 들어 보였다.
"신부가 이거 없으면 맨손으로 입장해요. 인생에 한 번인데."
남자는 손목시계를 내려다봤다. 몇 초간의 침묵이 흘렀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벽에 걸린 차 키를 집어 들었다.
트럭 안에는 와이퍼 소리와 서하의 목소리가 번갈아 찼다.
"오늘 신부님이 아침부터 우셨거든요. 시어머니가 드레스 보고 한마디 하셨대요. 근데 신랑은 옆에서 폰만 보고 있고. 그게 더 서운했던 거예요. 말이라도 해주지…."
남자는 앞만 보고 운전하다가 짧게 대꾸했다.
"신랑한테 어머니 막으라고 하면 되잖아요."
서하가 그를 돌아봤다.
"그걸 몰라서 우는 게 아니죠."
"그럼 뭘 몰라서 우는데요?"
서하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설명하자면 길었고, 설명한다고 이 남자가 알아들을 것 같지도 않았다.
"…됐어요. 운전이나 하세요."
트럭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러다 남자가 갑자기 핸들을 꺾어 좁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어디 가요? 앱은 직진이라는데!"
"직진하면 공사 구간이에요. 이쪽이 4분 빨라요."
웨딩홀 앞에 트럭이 멈췄을 때, 서하는 무심코 시계를 봤다. 정확히 5분이었다.
"…진짜 4분 빨랐네."
"말했잖아요."
서하는 문을 열고 내리다가 멈칫했다. 빗방울이 그녀의 어깨에 떨어졌다. 그녀는 뒤돌아 남자를 봤다.
"근데요. 아까 그 신부 얘기, 그냥 들어주기만 하면 돼요. 사람들은 대부분 답을 몰라서 얘기하는 게 아니거든요."
서하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웨딩홀 안으로 뛰어갔다. 남자는 그녀가 회전문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시동을 다시 걸려던 그는 조수석을 봤다. 분홍색 케이스의 휴대폰이 놓여 있었다. 그 순간 화면이 밝아지며 알림 하나가 떴다.
[신부님] 플래너님 어디세요?? 신랑이 사라졌어요!!!
강도현은 휴대폰을 쥔 채 웨딩홀 쪽을 올려다봤다.
"…그래서 결론이 뭔데."
그는 혼잣말을 하며 트럭 문을 열었다.
2장 동굴에 숨은 남자
신부대기실은 울음바다였다. 신부 서연은 화장이 번질까 봐 휴지로 눈가만 꾹꾹 누르고 있었고, 서하는 가방을 뒤집어 털고 있었다.
"폰, 폰, 내 폰! 식순표도 연락처도 다 거기 있는데…."
그때 문이 열렸다. 아까 그 남자가 분홍색 휴대폰을 내밀고 서 있었다.
"차에 두고 갔어요."
"은인이세요."
서하는 휴대폰을 거의 낚아채듯 받아 들었다.
"근데 지금 신랑이 없어졌거든요. 정말 감사했고요, 이제 가셔도 돼요."
하지만 남자는 가지 않았다. 대신 창가로 걸어가 주차장을 내려다봤다.
"신랑 차 뭐예요?"
"흰색 SUV요… 왜요?"
서연이 훌쩍이며 대답했다. 남자가 창밖 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 있네요. 차를 두고 갔으면 멀리 안 간 거예요. 비 오니까 지붕 있는 데."
복도를 걷는 남자의 걸음은 빨랐다. 서하는 거의 뛰다시피 그를 따라갔다.
"출입구 세 개, 비상계단 두 개, 주차장 연결 통로 하나. 로비는 하객 때문에 숨을 데가 없고요."
그는 머릿속에 건물 도면이라도 펼쳐놓은 사람처럼 말했다. 서하가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잠깐만요. 어디로 갔는지보다 왜 갔는지가 먼저예요."
"이유가 위치를 바꿔요?"
"바꾸죠! 도망친 거면 주차장, 울고 싶은 거면 화장실. 근데…."
서하는 말을 멈추고 복도 한가운데 섰다. 아침의 장면이 떠올랐다. 신랑 민재가 대기실 구석에서 휴대폰만 들여다보던 모습. 신부는 그걸 무관심이라고 했지만, 서하가 본 민재의 얼굴은 달랐다.
"그 사람, 아침 내내 폰만 봤어요. 근데 표정이 무관심이 아니었어요. 뭔가 썼다 지웠다 하는 얼굴이었어요."
남자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럼 아무도 말 안 거는 데 있겠네요."
"네?"
"남자는 생각 정리할 때 혼자 있어요. 조용하고, 사람 안 오고, 도망갈 구멍은 있는 데."
서하는 먼저 초록색 비상계단 표지판을 봤다. 남자의 시선도 곧 그곳에 닿았다.
신랑은 4층과 5층 사이 계단참에 앉아 있었다. 턱시도 차림으로, 휴대폰을 두 손으로 꼭 쥔 채였다.
"…오지 마세요. 5분만요."
남자가 뭔가 말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서하가 그의 팔을 살짝 잡았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민재의 옆 계단에 앉았다.
세 사람은 한동안 계단에 그대로 있었다. 형광등이 지지직거릴 때마다 민재의 그림자가 조금씩 흔들렸다. 먼저 입을 연 건 민재였다.
"엄마가 아침에 서연이 드레스 보고 한마디 했잖아요. 그때 제가 뭐라도 했어야 했는데, 아무 말도 못 했어요. 서연이한테 보낼 편지를 쓰다가, 엄마한테 할 말을 쓰다가… 결국 둘 다 한 줄도 못 썼어요."
서하는 고개만 끄덕였다.
"들어가면 둘 사이에 서야 하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서하가 고개를 들어 남자를 올려다봤다. 이번엔 당신 차례라는 눈빛이었다. 남자는 계단을 몇 칸 내려와 민재 앞에 섰다.
"길게 쓸 필요 없어요. 한 문장이면 돼요."
"…네?"
"제일 하고 싶은 말. 그거 하나만."
신랑 입장 직전, 민재는 어머니 앞에 멈춰 섰다. 하객들의 웅성거림 속에서 그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엄마. 오늘 서연이 진짜 예뻐요. 나는 그거면 돼요."
굳어 있던 어머니의 얼굴이 천천히 풀어졌다. 입구 뒤편에서 그 말을 들은 서연이 웃으면서 눈물을 닦았다.
예식이 시작되자 서하는 뒷문으로 뛰어나갔다. 남자는 막 트럭에 올라타던 참이었다.
"저기요! 이름도 안 물어봤네요."
"필요해요?"
"아까 계단에서요. 저 혼자였으면 말만 하다가 못 찾았을 거예요."
남자가 문손잡이를 잡은 채 잠깐 그녀를 봤다.
"저 혼자였으면 찾아놓고 말을 잘못했겠죠."
서하가 먼저 웃자 도현의 입가도 아주 조금 풀렸다. 트럭은 곧 빗속으로 사라졌다.
그날 밤, 사무실에서 휴대폰을 들여다보던 서하는 손을 멈췄다. 연락처 목록에 처음 보는 이름이 하나 저장되어 있었다.
[최단 경로]
"…언제 저장했대."
서하는 피식 웃었다. 그때 메일 알림이 떴다. 다음 달 신규 상담 예약이었다.
신부: 강도희 / 보호자 연락처: 강도현
서하의 웃음이 그대로 굳었다.
3장 이틀간의 침묵
상담실에 들어선 신부 강도희는 밝은 얼굴이었다. 그 옆에서 팔짱을 낀 채 서 있는 남자는, 역시나 그 사람이었다. 서하는 최대한 프로다운 미소를 지었다.
"반갑습니다, 신부님. 그리고… 보호자님."
"어? 둘이 아는 사이야?"
"아니요."
"좀요."
두 사람의 대답이 동시에 엇갈렸다. 도희는 오빠와 서하를 번갈아 보더니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서하는 헛기침을 하고 서류를 넘겼다.
"입장 순서부터 볼게요. 혼주 입장 다음에 신부 입장인데요. 신부님 손은 누가 잡아주시나요?"
"당연히 오빠…."
도희는 말끝을 흐렸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빠. 나, 아빠한테 연락해 볼까 해."
도현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서하는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턱에 힘이 들어가고, 시선이 창밖 어딘가로 도망쳤다.
"…알아서 해."
도현은 그 말만 남기고 상담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아빠가 저 초등학생 때 집을 나갔거든요."
남겨진 도희가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오빠가 고등학생 때부터 저를 키웠어요. 학비도, 졸업식도, 다 오빠가 챙겼고요."
"그럼 오빠 마음이 많이 복잡하겠네요."
"근데 오빠는 절대 말을 안 해요. 힘들면 그냥 사라져요. 이틀이고 사흘이고."
도희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식장 답사 날짜 정해야 해요]
읽음. 답장은 없었다.
[혹시 제가 뭐 실수했어요?]
읽음. 역시 답장은 없었다.
서하는 친구들에게 차례로 전화를 걸었다. 한 명은 읽고도 답이 없으면 끝난 거라고 했고, 다른 한 명은 시작도 안 했는데 무슨 끝이냐고 했다. 마지막으로 전화를 받은 친구가 물었다. 그 남자가 왜 연락을 끊었을 것 같으냐고.
"그 남자 동생 결혼식이잖아. 너한테 화난 게 아닐 수도 있어."
서하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1분도 지나지 않아 다시 집어 들었다.
같은 시각, 도현은 베란다에 앉아 말없이 드론 프로펠러를 조이고 있었다.
이틀째 밤, 서하는 도현의 집 앞까지 갔다. 초인종 앞에서 몇 번이나 손을 내렸다가 겨우 눌렀다. 문을 연 도현의 손에는 검은 기름때가 묻어 있었다.
"답사 날짜 때문에 온 거예요. 업무상."
도현은 잠시 그녀를 보다가 문을 더 넓게 열었다.
"…들어와요."
베란다에는 반쯤 조립된 드론들이 놓여 있었다. 프로펠러, 모터, 전선들이 바닥에 가지런히 늘어서 있었다.
"이틀 동안 이거 만든 거예요?"
"생각할 때 손이 바빠야 돼서요."
"무슨 생각이요?"
도현은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서하는 재촉하지 않았다. 드라이버가 나사를 조이는 소리만 들렸다.
"아빠가 식장에 오면, 나는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지."
서하는 답을 내놓는 대신 그의 옆에 앉았다. 바닥에 놓인 프로펠러 하나를 집어 손가락 사이에서 천천히 돌렸다.
"안 물어봐요? 그래서 어떻게 할 거냐고."
"저번에 제가 그랬잖아요. 사람들은 답을 몰라서 얘기하는 게 아니라고."
도현이 서하를 봤다. 서하는 프로펠러를 내려놓았다.
"근데 하나만요. 다음에 동굴 들어갈 땐, 들어간다고 한 줄만 보내줘요. 이틀 동안 제가 무슨 상상까지 했는지 알아요?"
"무슨 상상이요?"
"그건… 업무상 기밀이고요."
도현이 웃었다. 소리 내어 웃는 그를 서하는 처음 봤다.
돌아가는 길, 휴대폰이 울렸다.
[최단 경로] 생각 끝났어요. 도희 손은 내가 잡아요. 아빠는 첫째 줄에.
서하는 걸으면서 미소 지었다. 그때 메시지가 하나 더 도착했다. 도희였다.
[도희] 플래너님… 아빠가 식장 답사 같이 오겠대요. 오빠한테는 아직 말 못 했어요.
서하의 걸음이 멈췄다.
4장 통역이 필요한 부자
"오빠한테 아직 말 못 했어요. 어떡해요?"
웨딩홀 로비에서 도희가 서하의 팔에 매달리듯 속삭였다.
"지금 말해도 늦었어요. 저기…."
회전문이 돌며 도현이 들어섰다. 그리고 거의 같은 순간, 반대편 주차장 쪽 문으로 낡은 점퍼 차림의 중년 남자가 들어왔다. 강태식이었다.
두 남자는 로비 한가운데서 걸음을 멈췄다. 대여섯 걸음이면 닿을 거리였지만 어느 쪽도 먼저 다가가지 않았다.
"…키가 컸네."
먼저 입을 연 쪽은 태식이었다.
"15년이면 크죠."
도희가 서하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서하는 두 사람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자, 두 분 다 오셨으니까 본식장부터 보실까요? 동선 설명 드릴게요!"
텅 빈 예식장에서 서하는 버진로드를 따라 걸으며 설명했다. 도현과 태식은 양쪽 끝에 멀찍이 떨어져 서 있었다.
"신부님은 여기서 오빠분 손을 잡고 입장하시고요, 아버님은 첫째 줄에 앉으시면 돼요."
"…그래. 그게 맞지."
태식이 작게 말했다. 서하의 눈길이 그의 손에 머물렀다. 점퍼 주머니 속에서 그의 손이 뭔가를 계속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입장 동선 다시 볼게요. 조명 위치 확인하고 올게요."
도현이 갑자기 말하고는 무대 뒤로 사라졌다. 서하는 그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또 동굴이구나.
서하는 커피 두 잔을 들고 테라스로 나갔다. 태식이 난간에 기대 서 있었다.
"아까부터 주머니에 뭘 계속 만지시던데요."
태식은 멈칫했다가, 오래 망설인 끝에 그것을 꺼냈다. 모서리가 닳은 사진 한 장이었다.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 도현이 졸업장을 들고 서 있었다. 사람들 틈 사이로, 아주 멀리서 찍은 사진이었다.
"이거… 졸업식에 가셨었어요?"
"들어가진 못했어. 담 밖에서."
"왜 말씀 안 하셨어요?"
"말하면 뭐가 달라지나. 떠난 건 나인데."
서하는 사진 속 도현과 눈앞의 태식을 번갈아 봤다. 말을 아낄수록 어깨가 굳는 모습이 두 사람은 닮아 있었다.
"…닮았네, 진짜."
무대 뒤에서 도현은 괜히 조명 스위치를 껐다 켰다 하고 있었다. 서하가 들어오자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아무 말도 하지 마요."
"안 해요. 하나만 전해줄게요. 통역이에요."
"통역?"
"아버님 말을 번역하면 이거예요. '나도 네 졸업식에 있었다.'"
스위치 위에서 도현의 손이 멈췄다. 무대 뒤가 어둠에 잠긴 채로 멈춰 있었다.
"…그걸 왜 당신이 알아요?"
"사람이 말 안 하는 걸 읽는 게 제 일이라서요."
한참의 침묵 끝에 도현이 낮게 말했다.
"당신은 왜 매번 알아요. 내가 말 안 해도."
불 꺼진 무대 뒤에서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웠다. 서하가 먼저 한 걸음 물러섰다.
답사가 끝나고 태식은 먼저 떠났다. 주차장으로 간 도현은 트럭 와이퍼에 끼워진 봉투 하나를 발견했다.
봉투 안에는 은행 입금 내역서가 한 뭉치 들어 있었다. 받는 곳은 모두 같았다. 도희가 다녔던 대학교의 장학재단.
"도희 장학금… 익명 기부자가…."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멀리 버스 정류장에 태식의 굽은 뒷모습이 서 있었다.
5장 한 문장
결혼식 전날 밤, 도현은 조립을 끝낸 드론 앞에 오래 앉아 있었다. 손에 쥔 드라이버를 내려놓고 휴대폰을 들었다.
[최단 경로] 동굴 들어가요. 내일 아침에 나갈게요.
사무실에서 그 메시지를 받은 서하는 휴대폰을 가슴에 대고 웃었다.
"…한 줄 보냈네."
결혼식 당일 아침, 신부대기실. 서하가 도희의 베일을 정리하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정장을 차려입은 도현이 들어왔다. 눈이 조금 부어 있었다.
"오빠, 잠 못 잤지."
"잤어."
"거짓말."
서하와 도희가 동시에 말했다. 도현은 서하를 봤고, 서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은 도희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도희야. 입장할 때 계획 바꿀게."
"응?"
잠시 뒤, 예식장 안에서 사회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신부 입장!"
사회자의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도현이 도희의 손을 잡고 버진로드를 걸었다. 하객석이 조용해졌다. 서하는 맨 뒤에서 무전기를 쥔 채 그 모습을 지켜봤다.
첫째 줄 앞에서 도현이 걸음을 멈췄다. 태식이 놀란 얼굴로 아들을 올려다봤다.
"일어나세요."
"…어?"
"반은 제가 왔으니까, 나머지 반은 같이 가요."
태식은 떨리는 손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희의 한쪽 손은 오빠가, 다른 한쪽 손은 아버지가 잡았다. 세 사람이 남은 길을 함께 걸었다.
맨 뒤에서 서하는 무전기를 입에 댔다.
"음향팀, 음악 볼륨 조금만 올려주세요. 저 울 것 같아서요."
예식이 끝난 뒤, 도현과 태식은 테라스 난간에 나란히 섰다. 둘 사이의 침묵에는 전처럼 날이 서 있지 않았다.
"장학금 얘기는… 도희한테 하지 마라."
"안 해요."
도현이 난간 아래를 보며 덧붙였다.
"대신 명절에 한 번 와요. 그건 도희가 알아도 되니까."
태식은 고개를 숙인 채 웃었다. 멀리서 그 모습을 본 서하는 조용히 자리를 비켜주었다.
저녁이 되자 다시 비가 내렸다. 그날처럼. 짐을 들고 뒷문으로 나온 서하는 습관처럼 지도 앱을 켰다.
"주차장이… 이쪽인가?"
휴대폰이 빙글 돌았다. 그때 트럭 한 대가 그녀 앞에 멈춰 섰다. 창문이 내려가고 도현의 얼굴이 보였다.
"반대 방향이에요."
"알아요. 일부러 이쪽으로 걸은 거예요."
"왜요?"
"누가 데려다줄 것 같아서."
도현이 피식 웃으며 조수석 문을 열었다.
트럭 안에는 와이퍼가 유리를 쓸어내리는 소리만 났다. 서하도 이번에는 재촉하지 않았다. 빨간 신호 앞에서 도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하나 물어봐도 돼요?"
"길을 물어보는 거예요? 강도현 씨가?"
"네. 처음으로."
"…뭔데요."
"당신한테 가는 제일 빠른 길이 뭐예요."
서하는 도현의 옆얼굴을 바라보다 지도 앱을 껐다. 휴대폰을 무릎 위에 뒤집어 놓았다.
"그건 앱에 안 나와요. 그냥 이렇게 계속 옆에서 운전하면 돼요."
신호가 바뀌었다. 트럭은 빗속으로 천천히 출발했다.
2부
6장 그랬구나
"고객님, 예식 2주 전 취소는 위약금이… 네? 소송이요? 아니, 제가 무슨…."
뚝. 전화가 끊겼다. 서하는 책상에 이마를 댄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최단 경로] 저녁 7시. 그 파스타집.
사귄 지 3주째였다. 서하는 한숨 섞인 웃음을 지었다.
레스토랑에서 서하는 쉬지 않고 이야기했다. 도현은 포크를 든 채 멈춰 있었다.
"1년을 준비했어요. 드레스 피팅 네 번 따라가고, 새벽에 울면서 전화하면 다 받아주고. 그런데 파혼하더니 저보고 계약금을 돌려달래요. 제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겠고…."
"계약서에 취소 조항 있죠?"
"…있죠."
"그럼 법적으로 문제없어요. 소송해도 이겨요. 아는 변호사 소개해 줄게요. 그리고 그 고객은 앞으로 연락 차단하고…."
서하가 포크를 내려놓았다. 달그락, 하는 소리가 테이블 위에 떨어졌다.
"도현 씨."
"네."
"저 지금 이기고 싶어서 얘기한 거 아니에요."
"그럼요?"
"…됐어요."
도현은 그 말이 낯익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처음 만난 날 트럭 안에서도 서하는 똑같이 말했다. 테이블 위의 음식이 빠르게 식어갔다.
"오늘은 그냥 집에 갈게요. 혼자 갈 수 있어요."
"데려다줄게요."
"반대 방향으로 걸어도 이번엔 따라오지 마요."
서하는 뒤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이번에는 길을 틀리지 않았다. 도현은 그녀가 모퉁이를 돌 때까지 움직이지 못했다.
그날 밤 도현은 대형 서점의 연애 코너를 두 바퀴나 돌았다. 결국 『말을 듣지 않는 남자 지도를 읽지 못하는 여자』를 꺼내 들었다. 제목을 읽던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나네."
계산대 직원이 책 제목을 보고 살짝 웃었다. 도현은 괜히 헛기침을 했다.
그날은 베란다 작업대에 드론 대신 책이 놓였다. 도현은 새벽까지 형광펜을 들고 읽다가 노트에 세 줄을 적었다.
1. 해결책 금지
2. 끄덕이기
3. "그랬구나"
그리고 욕실 거울 앞에 서서 진지하게 연습했다.
"그랬구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다시 끄덕였다.
"이게 맞나."
다음 날 낮, 서하의 사무실 문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커피 두 잔을 든 도현이 서 있었다.
"5분만요. 어제 얘기 다시 해줘요."
"…왜요?"
"이번엔 듣기만 할게요."
서하는 그를 못 미더운 눈으로 보면서도 이야기를 다시 시작했다.
"그 신부님이 처음 왔을 때…."
"그랬구나."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아무 얘기도 안 했는데요."
"…그랬구나."
"도현 씨, 3초에 한 번씩 끄덕이는 거 알아요?"
"책에 그렇게…."
서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웃다가 눈가에 맺힌 물기를 손끝으로 닦았다.
"책을 샀어요? 그 책을?"
"제목 보자마자 샀어요. 저인 줄 알고."
웃음이 잦아들자 서하가 조용히 말했다.
"…근데 이상하다. 해결된 거 하나도 없는데 기분은 풀렸어요."
"그게 책에 있던 말이에요. 그런데 이제야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그날 저녁, 회사로 돌아온 도현을 본부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강 팀장, 싱가포르 물류 허브 신설하는 거 알지? 거기 총괄 자리에 자네를 추천했어. 3개월 뒤 출국이고, 최소 3년이야."
도현의 표정이 굳었다. 주머니 속 휴대폰이 진동했다.
[서하] 오늘 고마웠어요. 다음 주 우리 첫 여행, 계획 다 짜놨어요! ✈️
도현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답장은 쓰지 못한 채 휴대폰을 책상 위에 뒤집어 놓았다.
7장 한 번에 하나만
카페 테이블에는 태블릿과 휴대폰, 여행 안내서가 겹쳐 놓여 있었다. 서하는 이어폰을 한쪽 귀에 꽂은 채 두 화면을 번갈아 눌렀다. 맞은편의 도현은 식어가는 커피잔만 만지고 있었다.
"네, 부케는 작약으로요. 도현 씨, 숙소 여기 어때요? 아, 잠깐만요. 신부님 문자."
"서하 씨, 나 할 말이…."
"아니요, 흰색 말고 아이보리요! 응, 말해요. 듣고 있어요."
"…아니에요. 통화 끝나면요."
30분 뒤 통화가 끝났다. 도현은 숨을 한 번 고르고 입을 열었다.
"회사에서 얘기가 하나 나왔는데…."
"아 맞다! 렌터카 예약! 계속 말해요, 나 두 개 동시에 돼요."
"나는 안 돼요."
휴대폰을 두드리던 서하의 손가락이 멈췄다.
"…네?"
"나는 한 번에 하나만 돼요. 말하는 것도, 듣는 것도."
서하는 손을 멈추고 도현의 얼굴을 봤다. 말할 차례를 오래 기다린 사람처럼 지쳐 보였다.
그날 밤 서하는 사무실에 혼자 앉아, 도현이 두고 간 그 책을 펼쳤다. 멀티태스킹에 관한 페이지에 형광펜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여백에는 삐뚤빼뚤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서하는 동시에 다 들을 수 있다. 나는 아님. 억울함.
서하는 소리 없이 웃었다. 그러다 문득 웃음을 멈췄다.
"…근데 아까 무슨 얘기를 하려고 했던 거지?"
여행 전날 밤, 서하를 데려다주는 트럭 안. 서하가 보란 듯이 휴대폰을 가방 깊숙이 집어넣었다.
"이거 봐요. 폰 넣었어요. 이제 하나만 해요."
"뭘요?"
"도현 씨 얘기 듣는 거. 아까 하려던 말."
도현의 손가락이 운전대를 세게 감쌌다. 신호가 빨간불로 바뀌었지만 그는 좀처럼 말을 꺼내지 못했다.
"회사에서… 휴가 승인 났어요. 4일."
"그게 그렇게 어려운 얘기였어요?"
"…네."
서하는 웃으며 차에서 내려 손을 흔들었다. 혼자 남은 도현은 운전대에 이마를 댔다.
"여행 가서 말하자. 거기선 도망갈 데도 없으니까."
고개를 들던 그의 눈에 조수석 아래 떨어진 종이 한 장이 들어왔다. 서하의 여행 체크리스트였다. 마지막 줄에 그녀의 글씨가 적혀 있었다.
✔ 이번 여행 목표: 도현 씨한테 "사랑해" 먼저 말하기
8장 길을 묻지 않는 여행
강원도 산길 한복판에서 내비게이션이 멈췄다. 화면에는 '경로를 탐색할 수 없습니다'라는 문구만 떠 있었다. 두 사람의 휴대폰 모두 신호가 없었다.
"어떡해요? 되돌아갈까요?"
"괜찮아요. 해 위치를 보면 대충 방향이 나와요. 동쪽으로 가면 돼요."
"대충이요? 지도 천재가?"
"지도가 없으니까 대충이죠."
한 시간 뒤, 그들은 같은 정자를 세 번째로 지나치고 있었다.
"저 정자 아까 봤어요. 두 번."
"비슷하게 생긴 거예요."
"지붕에 제비집까지 똑같은데요?"
그때 밭에서 일하던 할머니 한 분이 허리를 폈다.
"저기 물어보면 되겠다!"
"조금만 더 가보고요."
서하는 대답 대신 창문을 내렸다.
"할머니! 읍내 가는 길이 어디예요?"
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두 사람은 할머니 댁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게 됐다. 마당 평상 위에 삶은 옥수수와 감자가 올라왔고, 할아버지가 무뚝뚝하게 막걸리를 따라주었다.
"이 양반도 50년 동안 길 한 번을 안 물었어. 장날에 읍내 간다고 나가서 옆 동네 장에 간 게 몇 번인지."
"거기 장이 더 좋았어."
"봐, 봐. 끝까지 인정을 안 해."
서하는 웃다가 도현과 눈이 마주쳤다. 도현은 헛기침을 했다.
밤이 깊어지고 할머니와 서하가 방으로 들어간 뒤, 평상에는 할아버지와 도현만 남았다. 한참 동안 두 사람은 말없이 막걸리만 마셨다.
"할 말 있는 얼굴이네."
"…티 나요?"
"나도 그런 얼굴로 50년을 살았어. 근데 저 사람이 다 알더라고. 말 안 해도."
"그럼 말 안 해도 되는 거예요?"
"아니. 알아도 기다리는 거야. 그게 더 서운한 거고."
도현은 막걸리 잔을 내려놓았다.
비가 그친 뒤 구름 사이로 별이 드문드문 보였다. 담요를 두른 서하가 도현 옆에 와 앉았다.
"나, 이번 여행에 목표가 하나 있었거든요."
"나도요. 할 말이 있어요."
"잠깐, 나 먼저요. 순서 기다리다가 또 못 할 것 같아서."
서하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사랑해요. 그리고 나 길치라서, 이제 도현 씨 없으면 진짜 못 살 것 같아요."
도현은 서하를 봤다. 준비해 온 말이 목에 걸렸다.
"이제 도현 씨 차례."
"…나도요. 사랑해요."
서하는 도현의 어깨에 기대었다. 도현은 입술을 몇 번 달싹였지만 싱가포르 이야기는 끝내 꺼내지 못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다음 날, 서하는 짐 정리를 도와주러 도현의 집에 들렀다. 도현이 샤워하는 사이, 식탁 위에 놓여 있던 서류 봉투가 바닥에 떨어졌다. 서하는 무심코 그것을 주워 들었다.
인사발령 사전 통보. 강도현 팀장. 싱가포르 물류허브 총괄. 출국 예정일 11월 30일.
날짜 옆에 도현의 글씨로 짧은 메모가 적혀 있었다.
서하한테 언제 말하지.
욕실 문이 열렸다. 서류를 든 서하와 도현의 눈이 마주쳤다.
9장 동굴 금지령
"언제부터였어요?"
"…한 달 전."
"한 달. 파스타집에서 내가 울던 날도, 카페에서도, 별 보던 날도?"
"결정을 다 하고 말하려고 했어요. 반쯤 정한 걸 말하면 서하 씨만 불안하잖아요."
"그게 동굴이잖아요! 혼자 다 정하고 나와서 통보하는 거."
"통보하려던 거 아니에요."
"그럼 뭔데요? 이건 도현 씨 혼자 가는 길이 아니잖아요. 나도 그 지도 위에 있는 거잖아요!"
도현은 변명할 말을 찾지 못했다. 서하는 식탁 옆에 둔 가방을 집어 들었다.
"한 줄이라도 보내요. 약속했잖아요."
현관문이 닫혔다.
사흘 동안 도현의 대화창에는 새 메시지가 뜨지 않았다. 베란다 작업대에는 조립을 끝낸 드론만 늘어갔다. 서하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된 뒤에도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사흘째 되던 날, 신혼여행에서 막 돌아와 까맣게 탄 도희가 서하의 사무실을 찾아왔다.
"오빠가 사흘째 연락이 안 된다면서요."
"도희 씨가 그걸 어떻게…."
"오빠가 저한테 전화했거든요. 새벽 세 시에. 한 시간 동안 아무 말도 안 하다가 그냥 끊었어요."
서하는 대답하지 못했다. 도희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오빠, 옛날에도 이런 적 있어요. 대학 때 유학 장학금에 붙었는데, 저 혼자 두고 못 간다고 그냥 포기했어요. 저한테는 떨어졌다고 거짓말하고요."
"이번에도 그러려는 거예요?"
"모르죠. 근데 오빠는 누굴 두고 떠나는 게 제일 무서운 사람이에요. 아빠가 그랬으니까."
서하는 창밖을 오래 바라봤다. 그러다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이번엔 안 찾아갈래요."
"네?"
"이번엔 그 사람이 스스로 나와야 해요. 제가 문을 두드리면, 또 제가 대신 읽어주는 거니까."
그날 밤, 도현의 집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연 도현 앞에 서 있는 건 서하가 아니었다. 소주 두 병을 든 태식이었다.
"도희가 가보라더라."
작업대 옆에 부자가 나란히 앉았다. 태식은 서하가 그랬던 것처럼 먼저 묻지 않았다. 소주잔이 두 번 비워진 뒤에야 입을 열었다.
"나는 말 안 하고 떠났다."
"알아요."
"네 엄마한테 한 줄만 남겼어도, 너희가 그렇게 오래 기다리진 않았을 거다. 그게 제일 후회된다."
도현은 고개를 숙였다.
"가든 안 가든 상관없어. 근데 말은 하고 정해라. 너는 나처럼 살지 마."
태식은 마지막 잔을 비우고 일어났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던 그가 뒤돌아봤다.
"그 아가씨, 내 사진 한 장 보고 다 알아본 사람이다. 그런 사람 흔하지 않아."
같은 시각, 서하는 불 꺼진 방에 앉아 있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사흘 만이었다.
[최단 경로] 동굴에서 나왔어요. 늦어서 미안해요.
[최단 경로] 출국 전날 밤, 거기서 기다릴게요. 이번엔 같이 정하고 싶어요.
"거기가… 어딘데."
답장을 쓰려는 순간, 화면에 배터리 부족 경고가 떴다. 그리고 휴대폰이 꺼졌다.
10장 지도를 그리는 여자
출국 전날 밤. 충전기에 꽂아둔 휴대폰은 끝내 켜지지 않았다. 떨어뜨렸을 때 금이 간 액정 아래로 아무 빛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서하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거기가 어디야. 파스타집? 웨딩홀? 할머니 댁?"
서하는 눈을 감고 도현의 습관을 하나씩 떠올렸다. 길이 막히면 골목으로 꺾었고, 일이 엉키면 처음 지점으로 돌아갔다.
"그 사람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사람이야. 경로가 꼬이면… 출발점으로 돌아가."
서하는 눈을 떴다.
"물류창고."
서하는 종이 한 장을 꺼내 볼펜으로 지도를 그렸다. 처음 만난 날, 그가 두 번이나 반복했던 길을 떠올리면서.
"좌회전… 두 번째 신호… 우회전… 육교…."
하지만 이번에는 거꾸로 가야 했다. 웨딩홀에서 창고로. 서하는 버릇처럼 종이를 빙글 돌렸다. 그러다 손을 멈췄다.
"아니야. 종이를 돌리지 말고… 내가 돌면 되잖아."
서하는 종이를 가만히 두고 자기 몸을 돌려 방향을 맞췄다. 그리고 걷기 시작했다.
두 번째 신호에서 그녀는 헷갈렸다. 편의점에 들어가 직원에게 길을 물었다. 육교 위에서는 숨이 차서 잠시 멈춰 섰다. 멀리 물류센터의 불빛이 보였다. 서하는 종이 지도 위 창고 자리에 볼펜으로 동그라미를 쳤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
처음 만난 날의 그 표지판 앞에서 서하는 헐떡이며 멈춰 섰다.
어둠 속에서 낮은 모터 소리가 들렸다. 창고 앞 공터에서 여러 대의 드론이 차례로 떠올라 작은 불빛의 길을 만들었다. 서하가 방금 걸어온 방향과 나란한 선이었다.
선이 끝나는 곳에서 도현이 걸어 나왔다.
"찾아왔네요."
"길 한 번 물어봤어요. 편의점에서."
"잘했어요. 나는 그걸 서른여섯 살에 배웠는데."
도현이 한 걸음 다가왔다.
"싱가포르, 아직 결정 안 했어요."
"내일 출국이라면서요."
"사전 답사만 가는 거예요. 본부장한테 말했어요. 혼자 정할 수 없는 일이라고. 같이 정할 사람이 있다고."
서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현이 말을 이었다.
"가면 3년이에요. 안 가면 여기서 지금처럼 살고요. 나는 둘 다 괜찮아요. 서하 씨가 지도에 있기만 하면."
서하는 도현의 말을 속으로 천천히 되짚었다. 이번에는 그녀가 먼저 물었다.
"싱가포르에도 결혼식 하죠?"
"…네?"
"거기 사는 한국 사람들 결혼식은 누가 해줘요? 웨딩플래너 필요하잖아요."
"같이 가겠다는 거예요?"
"같이 정하자면서요. 정했어요. 대신 조건 있어요."
"뭔데요."
"동굴 들어갈 땐 한 줄. 무조건."
도현이 웃었다.
"두 줄 보낼게요."
도현이 리모컨을 누르자 불빛들이 흩어졌다가 작은 원을 만들었다. 준비한 티가 너무 나서 서하는 울다가도 웃음이 났다.
"한 문장이면 된다고 했죠."
도현이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평생 옆에서 운전할게요."
서하는 젖은 눈가를 손등으로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필로그
6개월 뒤, 웨딩홀 신부대기실.
드레스를 입은 서하의 손에는 여전히 무전기가 들려 있었다.
"음향팀, 입장곡 3초 뒤에 시작이요! 꽃잎은 두 번째 줄부터!"
"언니, 본인 결혼식인데 무전기 좀 내려놔요!"
도희가 기가 막힌다는 듯 무전기를 빼앗았다.
본식장 첫째 줄에는 태식이 앉았다. 강원도에서 올라온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옆자리를 지켰다.
"여기가 3층 맞나?"
"2층이라니까. 물어보라니까!"
문이 열렸다. 버진로드 끝에서 도현이 서하를 기다리고 있었다. 천천히 걸어가던 서하가 중간에 멈칫했다.
"…잠깐, 방향 맞아요?"
도현이 손을 내밀었다.
"반대 방향이어도 괜찮아요. 데려다줄게요."
서하는 그 손을 잡았다.
— 끝 —